2018년 2월 26일 월요일
오늘 아침 둘을 앞세우고 셋이 자전거를 타러 나갔을 때 남편이 띠링띠링 자전거 벨을 울리면 아이가 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울리는 놀이를 하면서, 나에게서 마무리 지어지는 우리 가족의 역동을 실감했다. 내가 벨을 울리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 하고 부른다. 손가락이 추워 가끔은 못 들은 척 하고 벨을 안 울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먼저 울려봐도 됐을 걸, 그럴 생각은 안한 걸까 못한 걸까. 뉴욕을 떠나 영국 캠브리지로 이사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는 동안 남편이 새 직장 일을 시작하고 아이가 새 학교에 배정될 때까지, 집을 보러 다니고 짐이 도착할 때까지 쓸 임시 살림살이를 마련하고 10파운드 20파운드를 아낀다고 괜히 동분서주하면서, 나는 이들이 자리를 잡아야 비로소 내 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마음으로 지내 오고 있다. 내 일이라고 해봤자 논문을 쓰는 지리함 그리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내 삶의 불안감을 마주하는 것인데도,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나는 혼자 되는 시간을 늘 기다린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데리러 가면 멀리서부터 목을 빼며 아이를 찾으면서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져 웃음이 나고, 저녁 준비를 위해 가스불을 켤때면 어딘가 설레는 것은, 아이와 남편에 대한 돌봄의 노동이 내 깊은 데 자리 잡은 어떤 자발적 동기 - 내가 스스로 지핀 어떤 따스한 동기에 기인하는 부분이 일부 있음을 반증한다. 바람 앞의 촛불 주위를 맴돌 듯, 그 이름 모를 동기에 나는 매일같이 이끌린다. 동시에, 그 촛불이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불 번지듯 신비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름은 무섭다. 영국에도 미국처럼 어머니날이 3월에 있는지 상점마다 "Mum is the word" 라는 문구가 반지 가게에, 그릇 가게에, 고급 속옷 가게, 주방용품 가게 앞에 붙어 있다. 이쯤 되면 나는 촛불이 아니라 어떤 화염에 둘러싸인다. 나를 어머니라고, 아내라고 치켜 세움으로써 나의 자발성에 이름을 붙이고, 고로 나를 그 이름에 묶어두는 힘. 따스함을 찾아 나 스스로 켠 촛불이 불씨가 되어 번진 불길에 갖혀 나는 종종 길을 잃는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돌보는 이 작은 기쁨에 여성성의 범주를 두르고 '무임금'이라는 형용사를 갖다 붙인 것은 누구인가? 자본이라는 서사를 내 삶에서 읽어내는 첫 발을 떼어보고 있다.
피드 구독하기:
댓글 (Atom)
댓글 1개:
Que seas muy feliz en Inglaterra.
Hasta luego...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