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일 월요일

해가 질때까지 창문을 열어 두고 있었나보다. 거실에 불을 켜고 앉아 있으려니 나방 한 마리가 부랴부랴 날아 들어 와 거실과 부엌을 누빈다. 크기도 찻받침 만한 게 크고 시커먼 게 날아 다니니 나는 빗자루를 집어 들고 쫓아가 휘둘러 보았다. 급히 무언가를 꼭 찾아야 해서 온 것처럼 이쪽 저쪽 날아가보더니 전등에 가까워진 뒤로는 동선이 짧아지면서 그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빗자루를 휘저어 창문쪽으로 가게 해보았는데 소용이 없었다. 순간 떠오른 생각은 이 나방이 자발적으로 나가게 하는 법. 불을 끄는 것이었다. 불을 끄고 나자 안은 깜깜해졌고, 다만 해가 지고서 남긴 저녁 노을로 아직은 밝은 바깥의 저녁 공기만이 창밖으로 푸르게 보였다. 창문을 더 열어 젖히고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창문을 닫고 다시 불을 켜니 나방은 가고 없었다.

2019년 4월 30일 화요일

하던 일을 멈추고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 놓고 각자 일터로 나간 가족들의 자리를 정리하는 마음.  아이의 잠옷을 갤 때, 그가 깜빡 잊고 켜 놓고 간 온풍기를 끄며 남은 온기를 쬘 때. 잠에서 깨자마자 잘 가라는 말만 서둘러 남기고 시작한 하루가 잠시 따뜻해지는 시간.

2018년 12월 1일 토요일

청소부

은수가 테니스를 배우는 어느 오후.. 오후라고는 하지만 네시면 깜깜해지는 이곳에서 저녁과 다름이 없는 그 시간을 테니스장 옆 나무아래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옆 초등학교 건물 한쪽에 불 켜진 교실을 청소하고 있는 분이 보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땋은 뒷모습 정도가 보였다. 미국에서도 그랬지만 이곳도 학교 청소는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뒤 청소 담당자들이 하시는 모양이다. 아이들이 방과후 학교나 학원에 가거나, 아니면 집에 가 있는 동안, 아이들이 아닌 누군가가 청소를 한다. 물론 선생님들도 아니다. 

이런 장면들을 볼 때면, 한국에서 학교다닐 때 학교 곳곳 -교실, 복도, 화장실, 교무실, 특활실까지 모두를 청소하던 게 생각난다. 빗자루로 쓸고 기름걸레로 마루에 윤기를 내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했던 매일의 일과. 청소는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건 그 때의 언어로 설명하면 ‘힘드니까’ ‘빨리 놀고 싶으니까’ 였을 테고, 또 한편으론 청소가 그저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하는 거다’ 라는 학교 전체를 지배하던 만트라를 체화하는 방식이었을 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구도 청소의 의미를 이야기하지 않았고, 시키니까 했을 뿐이다.

예컨대 ‘내가 있던 곳은 내가 치운다’는 상식이 공유되고 또 생활에 자리잡도록 하는 과정으로서의 가르침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모두가 각자 있던 자리를 치우는 것이 청소였다면 - 그랬다면, 청소는 내 책상 주변 치우기 정도 규모의 일로서 여전히 좀 귀찮기는 해도 비교적 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생님들도 함께 청소를 했을 것이다 - 권력관계에서 '아랫사람'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공간을 함께 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로서의 청소. 그랬다면 학생들이 교무실 청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학생들도 더이상 청소를 하지 않는다. 대신에 청소부들이 오신다. 그리고 청소부들은 월급도 적고 고용이 불안정한, 자본사회에서 '아랫사람'에 위치한다.

왜 선생님들도 청소를 함께 하는 것 대신, 아이들도 청소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뀐 걸까? 아이들은 ‘청소할 시간에’ 공부를 더 하고 (그 시간에 더 쉬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 대학을 더 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아진 것은 무엇일까, 대학을 가면 어떻게 되길래?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에, 자아실현을 하기 때문에, 세상에 ‘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때문에? 그런 아이들은 청소부가 되기 보단, 다른 무언가가 되어갈 것이다. '내가 있던 곳은 내가 치운다'는 상식은 내버려둔 채로. 

2018년 2월 26일 월요일

오늘 아침 둘을 앞세우고 셋이 자전거를 타러 나갔을 때 남편이 띠링띠링 자전거 벨을 울리면 아이가 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울리는 놀이를 하면서, 나에게서 마무리 지어지는 우리 가족의 역동을 실감했다. 내가 벨을 울리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 하고 부른다. 손가락이 추워 가끔은 못 들은 척 하고 벨을 안 울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먼저 울려봐도 됐을 걸, 그럴 생각은 안한 걸까 못한 걸까. 뉴욕을 떠나 영국 캠브리지로 이사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는 동안 남편이 새 직장 일을 시작하고 아이가 새 학교에 배정될 때까지, 집을 보러 다니고 짐이 도착할 때까지 쓸 임시 살림살이를 마련하고 10파운드 20파운드를 아낀다고 괜히 동분서주하면서, 나는 이들이 자리를 잡아야 비로소 내 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마음으로 지내 오고 있다. 내 일이라고 해봤자 논문을 쓰는 지리함 그리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내 삶의 불안감을 마주하는 것인데도,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나는 혼자 되는 시간을 늘 기다린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데리러 가면 멀리서부터 목을 빼며 아이를 찾으면서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져 웃음이 나고, 저녁 준비를 위해 가스불을 켤때면 어딘가 설레는 것은, 아이와 남편에 대한 돌봄의 노동이 내 깊은 데 자리 잡은 어떤 자발적 동기 - 내가 스스로 지핀 어떤 따스한 동기에 기인하는 부분이 일부 있음을 반증한다. 바람 앞의 촛불 주위를 맴돌 듯, 그 이름 모를 동기에 나는 매일같이 이끌린다. 동시에, 그 촛불이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불 번지듯 신비화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름은 무섭다. 영국에도 미국처럼 어머니날이 3월에 있는지 상점마다 "Mum is the word" 라는 문구가 반지 가게에, 그릇 가게에, 고급 속옷 가게, 주방용품 가게 앞에 붙어 있다. 이쯤 되면 나는 촛불이 아니라 어떤 화염에 둘러싸인다. 나를 어머니라고, 아내라고 치켜 세움으로써 나의 자발성에 이름을 붙이고, 고로 나를 그 이름에 묶어두는 힘. 따스함을 찾아 나 스스로 켠 촛불이 불씨가 되어 번진 불길에 갖혀 나는 종종 길을 잃는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돌보는 이 작은 기쁨에 여성성의 범주를 두르고 '무임금'이라는 형용사를 갖다 붙인 것은 누구인가? 자본이라는 서사를 내 삶에서 읽어내는 첫 발을 떼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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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일 화요일

어제 오늘 걸쳐 그림책 한 권과 논픽션 한 권을 읽었다. 그림책 Town is by the sea  (writing by Schwartz/ illustration by Sydney) 는 바닷가 탄광촌의 남자 아이가 바라보는 광부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될 자신의 운명, 논픽션 Kids at work  (by Freedman)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활동한 사진사 Lewis Hine이 아동 노동 착취 현장들을 기록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둘 모두 아동과 노동에 관한 책들이었다. 

그리고 둘 모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Hine이 남긴 사진들은 차마 바라보기 힘든 참혹한 현실을 담고 있음에도, 현실을 바꾸고자 한 Hine의 열정과 그 현실을 버티는 (혹은 버티다 못해 짓눌려 버린) 아이들의 무심한 얼굴이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면서 눈을 떼기 어려운 힘을 만들어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드러는 채로 서서, 아이들은 포즈를 취하는 게 아니라 사진사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노동은 부끄럽지 않다, 영원히. 그러나 그들을 착취하는 현실, 그 현실을 묵과하는 더 큰 현실은 사진 속 아이들이 Hine을 바라본 그 시선 아래서 영원히 부끄러울 것이다. 흑백 사진의 명암 속에서 병치되는 시선들의 이 구조는  Town is by the sea 에서도 계속된다. 매일 갱으로 향하는 아버지와 그 뒤에 남은 아이가 보내는 하루, 귀가하는 아버지와 함께 하는 따뜻한 시간,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일상을 아이는 "This is how it goes" 라는 구절로 소개한다. 낮동안 아이는 햇살 가득한 바닷가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이따금씩 마음은 어둡고 위험한 갱 속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향하고, 그 마음의 시선을 따라 그림들 역시 밝은 지상과 어두운 지하를 반복해서 오간다. 마찬가지로 광부였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Bury me facing the sea b'y, I worked long and hard underground." 을 떠올리는 장면 다음으로는 두 페이지에 걸쳐 넓은 바닷가의 공동묘지와 그곳을 비추는 늦은 오후의 온유한 햇살, 그리고 그 속에서 무덤가를 살피는 아이를 조감도로 그린다. 하늘에서 바라본 아이가 유난히 작아 보이는 것은, 대대로 광부가 되는 운명을 "this is how it goes"로 읊조리는 아이의 마지막 문장들을 예견한다. 그러나 아이는 작지 않다 -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검댕 가득한 지친 몸이지만 아들을 힘껏 안아 올린다. 이러한 상승의 이미지는 아이가 존재하는 지상이라는 공간, 그리고 친구와 그네를 타며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느낌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등장한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또 유년기가 박탈되지 않은 이 아이는, 그의 운명이 무엇이든, 행복하다. 그러나, 그러나 운명은, 이미 너무나 깊이 아이 안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정월 초하루, 이 두 책을 마음에 품어본다.


2018년 1월 1일 월요일

그저께 병원에서 책불카드로 지불을 했다가 잔고가 부족해 일부만 지불된 일이 있었다. 내 얼굴을 아는 안내원은 말하기 민망해 하면서도, 나머지는 다음에 내도 된다며 '괜찮다'는 메시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웃는 표정을 지어 주었다. 다음 달이면 마지막 장학금이 입금되어 잔고 부족이 일단은 해결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병원에서의 일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육개월 뒤부터 장학금이 끊길 것이고 그때를 위해 지원했던 장학금들이 얼마 전 모두 거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연말 분위기, 그리고 한파와 겹치더니 - 자기 연민이라는 불을 내 안에 지피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작았던 불꽃이, 지난 한 해 나에게 찾아온 일들을 하나 둘씩 땔감으로 가져다 모았더니 불은 점점 커졌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그 불가에 앉아 몸을 데워보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불쌍한 나," 라고 말하며 불에 침을 뱉고, 이글거리는 불길이 마치 나의 업적인양 눈을 빼앗긴다.

이런 상태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를 다독일 방법을 찾고 있다. 어쩌면 저 불이 꺼지면 스스로 일어날지도 모르겠으나, 자기 연민은 습관이 되어 다시 제 스스로 피어오를 것이다. 그렇게 지피게 두고 걸어 나오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다. 너는 그 불 안 번지게 잘 지키고 거기 있으라고. 

나는 계속 걸어가야 하니까, 계속 만들어져 나가고 있으니까. 담아두고 털어내고 태우고 씹어먹고 음미하고 삼키고 아니면 뱉고 싸고 만지고, 품고 얼싸안고 내치고 밀어내고 다시 끌어 당기고, 그러면서. 그러면서 계속 춤 추어야 하니까. 


2017년 12월 26일 화요일

믿건대 먼저 밟으시는 언니들이여! 푹푹 디디어서 뚜렷이 발자취를 내어 주시오. 어지간하여도 또 눈이 오더라도 그 발자국의 윤곽이나 남아 있도록. 깔려 있는 백설 위로도 만곡요철이 보이건마는 그 속에 묻혀 있는 탄탄대로는 보이지 않는구려.
  다행히 누가 먼저 밟아 놓은 발자국을 따라 길을 찾게 되었소마는 그 사람도 몇 군데 헛디딘 자국이 있는 것을 보니 이 두터운 눈을 한 번 밟기도 발이 시리거든. 그 사람은 길을 찾노라고 방황하기에 얼음도 밟게 되고 구덩이에도 빠지게 되었으니 아마도 그 사람의 발은 꽁꽁 얼었을 것 같소. 동동 구르며 울지나 아니 하였는지 몹시 동정이 납니다.
   그러나 그 발자국 따라 반쯤 올라가니 그 사람의 간 길과 나 가고 싶은 길이 다르오그려. 나도 그 사람과 같이 두텁게 깔린 눈을 푹푹 디디어야만 하게 되었소. 차디찬 눈이 종아리에 가 닿을 때에는 선득선득하고 몸에 소름이 쭉쭉 끼칩디다. (중략) 아무려나 미끄러져서 머지가 터질 각오로 밟아나 볼 욕심이오.

나혜석, <학지광> 1917년 3월호

내가 나혜석에게서 캥기는 부분은 두 가지다. 자식들이 고통스러워했을 부분, 그리고 식민지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기회가 되면 더 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