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새로 만들어진 페미니즘 칼럼이 "여혐이 뭐예요?" 라는 질문에 답하는 세 꼭지로 문을 열었다. 첫 꼭지 초반부에 나오는, 여자도 여자를 혐오할 수 있다는 지적은, 여혐을 '남자'의 문제로 한정 짓지 않고 보게끔 하는 힘을 지녀 좋았다. 이런 접근은, 이분법으로 다루기도 또 이해하기도 쉬운 힘의 문제를 가능한 복잡하게 바라보게 하고, 결국 누구보다 복잡한 자기 자신의 속내까지 들여다보는 계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여혐과 닮은꼴인 각종 혐오 현상들, 동물에 대한 (인간도 엄연히 동물임에도), 이주민에 대한 (현존하는 인간은 아프리카에서부터 지구 곳곳으로 퍼져 나간 '이주민'임에도),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우리 모두가 그 시기를 거쳐 왔음에도), 나이든 사람들에 대한 (우리 모두가 그 시기를 향해가고 있음에도), 어쩌면 내가 아니기로 한 모든 것에 대한 혐오는 우리 모두에게 어느 정도 있다는 점에서, '내 안의' 혐오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마련해준다. 나를 면제하고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지나치게 모든 것을 나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바람직하지 않다.
반면, 여혐이 이루어지는 실제 맥락으로서의 가부장주의를 설명하는 데서는 맥이 빠졌다. 특히, "모든 곳에서 중요한 일을 남자가 하고 있어요. 신문이나 TV에 중요한 사람으로 나오는 사진들을 보면 대부분 남자일 거예요."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전제 하에, 이들이 주로 남자라는 것이 문제의 요지다. 비슷하게, "여자가 반장이나 회장과 같이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려고 할 때, 또는 중요한 의견을 낼 때" 여자의 능력이 부당하게 의심된다는 지적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 방식은 얼마나 타당한가.
남성 위주의 고위직에 여성이 진출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일부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가부장주의가 설정한 '중요한 일'의 틀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주요직을 여성도 맡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존재함을 암시하며, 그 점에서 여전히 차별주의의 언어를 구사한다. 이러한 언어 속에서는 그동안 여성의 일로 여겨져 온 일들, 그리고 가부장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천대받는 일들의 가치를 회복하기 어렵다. 여성이 배제되어 온 영역의 일들이 있다면, 남성이 배제되어 온 일들 또한 존재한다는 뜻이다.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직종에 남성의 역할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찾기 어렵다. 아니, 남자든 여자든 누구에게도 가사 노동을 의미 있는 직업의 한가지로 제시하는 경우는 없다. 나는 이 페미니즘 칼럼을 읽고 난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엄마를 보았을 때, '아, 우리 엄마는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 개인의 고유하고 자유로운 권한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방향이 않을까. 그러므로 이 칼럼의 요지는 여자도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주요직을 맡아야 한다, 반장 회장으로 뽑힐 수 있어야 한다가 아니라, 주요직이란 없으며 중요하지 않은 일 또한 없다, 여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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