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1일 월요일

처음보는 사람들

나는 멀리서도 사람을 쉽게 알아보는 터라 사람을 피해 일찌감치 가던 길을 바꾸곤 한다. 오늘 저녁 슈퍼마켓에서 토마토 집어 오는 것을 깜빡해 계산대 줄에서 빠져나오려다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온 것도 야채 코너에서 m을 보았기 때문이다. 양파를 봉지에 넣다 바닥에 떨어뜨린 m은 긴 상체를 구부려 손을 뻗고 있었고 나는 그 옆모습을 금방 알아보았다. 교실에서 교수로만 보던 사람을 다른장소에서 보는 것은, 언젠가 우리 건물 포터 펠릭스가 평소 입고 있는 수트 대신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퇴근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희한한 깨달음의 순간을 가져다준다. 유난히 무뚝뚝한데다, 워낙 사글사글한 데가 없어서 학생들이 m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대게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양파 하나쯤이야 떨어뜨릴 수 있었을 텐데, 계산하는 동안 나는 길게 구부려 양파를 바닥에서 집어 올리던 m을 못본척 하는 것이 마치 m에 대한 배려라도 될 것 처럼 유난히 서둘렀다.

은수 생일인 동지를 한 주 앞둔 그날은 여섯시가 삼십분도 더 남았는데 이미 한밤중의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 속을 밝히는 것은 지난 가을 문을 연 샐러드 가게 창에서 대낮같이 발 디딜틈 없는 손님들 사이로 쏟아져나오는 빛이었다. 덕분에 샐러드 가게 메뉴판을 창문 너머로 발끝을 세운 채 들여다보고 있는 h를 알아보았고, 마침 길 쪽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한 h이기에 나는 자동적으로 인사를 하겠다며 입까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Hi"의 하-가 내 입에서 나오려는 순간 h는 몸을 돌려 샐러드 가게 문을 잡았고, 무엇에라도 덴 것처럼 다시금 급하게 돌아섰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혼자 고개를 세게 저으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듯했다. 두 발자국 정도로 h를 그렇게 지나쳐 왔고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남편 지도교수의 파티에서 보던 밝은 얼굴의 h를 떠올려 놓고는 방금 지나 온 어둠 속 황망했던 h의 잔상을 이어갔다. 그 5초 동안 아마도 h는 샐러드 가게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떤 이유에서 망설이고 스스로를 단념시켰던 것 같다. h는 오늘 저녁을 함께 먹을 이가 없었을지도 모르고, 새로 생긴 가게의 샐러드가 무척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나는 '모르는' 장면이었다. 지난주 파티에서 h는 종류별 재활용 통을 만들어 놓고 손님들이 마구잡이로 쓰레기를 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기 손으로 직접 쓰레기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자, 이렇게 정리해놓고 나면 실제 쓰레기로 버리게 되는건 얼마 안 된다는 거지." 하며 유쾌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짜증도 실망도 없는 담담한 얼굴로. 언젠가 h는 치매가 든 당신 아버지의 유머감각이 대단하다는 이야기 하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he is just marvelous" 라고 했었다. 찌듦이 없는, 사춘기 직전의 11살 남자아이처럼 안정감이 있는 h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h가, 불안감이 많은 남편에게 해바라기같은 존재일 거라는 사실은, 그 집 책꽂이에 있는 액자 속 사진이 말해주고 있었다. h 에게 아기처럼 기대 눈을 감고 있는 그와 환히 웃고 있는 h의 모습. 그리고, 오늘 나는 혼자 있는 h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리고 h를 처음으로 보았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