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1일 목요일



바지 아랫단이 발목에 딱 붙었으면 좋겠다 즉 엄동설한에 스타킹을 신고 싶다- 는 주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은수는 울기 시작하였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 화내지 말라고’ “, 소리를 내준다며 잠시 진정되는듯 하였지만, 결국 어린이집에서 다시 바지 아랫단이 벙벙한게 싫다며 울기 시작하였다. 울음 소리를 등지고 어린이집을 떠나오는 동안 언제나처럼 죄의식이 불을 지폈다. 발단이 된 옷 짜증은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짐작되면서도,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서 그러는구나.” 하며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제스처를 취하지 않았었다. 문제 상황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자기 감정에 초점 맞추도록 하는, 자상한어법의 혐의가 느껴지기 시작했던 터이다
같은 상황에서 아이 엉덩이를 세게 떼리거나 어린이집 가자, 얼른!” 하며 강하게 아이 손을 낚아챘을 전근대성은 눈총을 산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아이에게 말해야 한다, “엄마랑 떨어지는게 싫구나, 그런데 어쩌지? 엄마는 일/공부하러 가야 하는데.” 탈근대의 육아 방식은 이렇게 비폭력을 권한다. 그러나 결과는 같다, 아이는 어미와 떨어지기 싫은데도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 암시되는 상하관계 또한 같다, 전자에서는 드러나고 후자에서는 대등함을 표방할 뿐이다 ㅡ 나는 너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또 너보다 덩치 크고 힘이 센 존재다. 공감하는 듯 말하고, 마음을 읽어주고, 감정을 코치를 해준다는 근대적 대화 스타일에서, 행복은 아이의 것인가, 아니면 단지 '옳바른' 육아론을 실천한 엄마의 것인가? 
내가 너의 말을 듣고는 있지만 들어주기는어렵다고 말하는, 되받아치는 어법에서 가장될 뿐인 공감.’ 그렇다고 공감의 부재를 암시하고 싶지도 않다. 공감의 아이러니를 발견하는 과정을 돕고싶을 뿐이다. 공감의 대부분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를 모르는존재로부터 찾아오곤 한다는 것을, 무관심은 네 그림자처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은수가 이해한다면. 엄마도 아빠도 자기를 가장 많이 닮았을지언정 가장 잘 이해하는존재가 아닐 수 있음을 이해한다면. 이를 위해서는 어법이 아니라 좀더 뿌리깊은 실천론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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