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가 되는 것이 '강해짐'의 계기로들 이야기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통한 담금질인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은수와의 첫 삼년동안 나는 아이가 가장 약한 시기를 죽지 않게끔 돌보는 데 치중했다. 자연 상태에서는 엄마나 아이의 조건으로 인해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면 아이는 죽게 된다. 인간의 경우 친엄마가 아니더라도 엄마의 엄마, 혹은 '엄마'의 동기를 가진 천사들이 있어 아이는 일단 '살고' 본다.
지난 삼년,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눈 밖에 나지 않게 하는 데 온 에너지를 쏟았던 것 같다. 엄마의 동기는 오로지 아이를 살려두는 데 있게 되고, 나아가 최소한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데로 맞춰지게 된다. 이렇게 하면 좋을까 저렇게 하면 더 좋을까를 생각한다.
하지만 삶은 진창이다. 엄마는 강하다고 할때, 이 진창을 삽으로 퍼내고 '내 아이'가 걸어갈 포장도로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건가? 대게들 그렇다고 말한다. 나 또한 그렇게 흘러들어감을 매일 느낀다. 하물며 아이는 이제 제 마음대로 뛰고 춤출수 있는데도 짧은 거리를 갈 때조차 유모차를 타자 떼쓴다. 엄마가 미는 유모차에 나른하게 앉아 수송되는 아이의 모습. 유모차를 가지고 나오지 않으면 결국 힘든 건 엄마 아빠다 - 떼 쓰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동기를 줘야 하고 때론 안아주기도 하면서, 10분이면 갈 길을 두배 세배는 더 걸려 가며 간다. 유모차에 태워 실어 나르는 게 아이도 좋아하고 효율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생 그 모드로 살아갈 것이 나는 가장 두렵다. 길을 걸어가며 제가 멈추고 싶을때 멈추고 뛰고 싶을때 뛰고 그러다가 엎어지고 재수없어 개가 싸놓은 똥도 밟고 하는 모드는 어떨까. 그러려면 더 재수가 없어서 차에 치이는 등 크게 다칠 위험을 감싸 안아야 한다. 그리고 아이의 떼쓰기에 결국 폭발하여 길거리에서 버럭 소리를 지를 품위저하의 가능성도 떠안아야 한다. 유모차에 안전띠 매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날 확률이 확실히 훨씬 높다. 하지만 그게 삶인데, 아이가 걸어갈 삶에서 아픈 일도 아주아주 아픈 일도 있게 마련일 텐데.
그렇게 되면 나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것은 엄마의 본능이기 때문에. 하지만 절망을 눈 앞에 두고 뛰어드는 게 삶인 이상, 나는 아이의 고통 앞에서 주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아이는 나 때문에 더 아플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아프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잘 되기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이 제 3의 바람은 무엇일지 묘연하다. 미답의 모성을 지향할 때 나는 비로소 '강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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