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8일 월요일

오줌싼 이불을 거둬 화장실로 갖고 간다. 대야에 세제를 풀고 주무르고 비비는 동안 일련의 생각들이 일어난다: 나는 빨래를 한다, 세탁기가 안하고? 기계보다 내가 빠는게 깨끗하다, 2달러를 아끼고 물도 아낄 수 있다, 나는 알뜰하다, 고 믿고 싶은 것이다. 나는 기계만큼 빨래를 못 짜고, 게다가 2달러와 물값은 나의 노동에 비해 '싸다.' 고로 나는 빨래를 하는 게 아니다.

오늘같은 추위에 세탁기도, 따뜻한 물도, 고무장갑도, 실내 화장실도, 또 아이의 밤중 소변을 받아줄 종이기저귀도 없던 시절, 오줌 빨래는 욕지기 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은 다 큰 언니나 누나의 몫이었을 터이고, 오줌 싼 아이는 몇대 맞거나 오줌싸개 키를 쓰고 소금구걸에 나섰을 터이다. 즐거움보다는 모욕의 경험이었을 동네 한바퀴, 그렇게 강한 부정적 강화를 통해서만 곤욕스러운 노동의 항목 하나를 줄였을 것이다.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주지 않는 것이 목표인 프로이드 이후 육아에서 배변 훈련은 이제 다른 풍경에서 펼쳐진다. 채근하지 말것, 혼내지 말것, 자기가 알아서 가릴 때까지 기다릴 것. 이불에 쩔은 오줌냄새는 조용히 없애고 죄의식은 세탁기가 지워준다. 엄마는 몸도 덜 힘들여가며 근대적 부모의 표식을 얻는다.

욕조에 쪼그리고 앉아 빨래 하는 너머로 은수가 인형을 갖고 와 논다. 어떻게 해도 내 몸에 담을 수 없는, 노동으로서의 빨래를 나는 몸짓으로 비벼보고 짜내본다. 세탁기가 있으므로 나는 힘들이지 않을 수 있다 - 안전끈을 매고 하는 암벽등반은 스포츠(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빨래를 하고 암벽을 오른다, 모든 게 '아닌' 몸짓으로. 아줌마를 '쓰고' 기계를 '돌리고' 안 그러면 엄마를 '부르면' 해결되는, '힘들게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이 즐비한 세상에서 내 노동력은 무가치하다.

그런데 아무 까닭 없이 나는 은수와 내 빤쯔를 손으로 빨고, 무릎 꿇고 때론 말놀이 하는 은수를 등에 태운채 걸레질을 한다. 이불 빨래를 하면서는 자괴감에 빠진다. 살림은 사치가 되었고 노동은 온통 남아도는 몸의 제스처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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