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지원에 낼 자기소개서를 붙잡고 이제 모레 마감일을 향해 가고 있다. 언제나처럼 자기소개서 쓰기는 참 곤욕이다. 그 글에는 오직 '나는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흐르고 있는데, 나는 '해야 한다'는 식의 should형 종결어는 '(실패, 절망, 아파)할 수밖에 없다'로밖에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수 말마따나 '엄마는 왜 공부를 해? 학교 왜 가는거야?'
그러다 얼마전 생선에 미림을 바르면서 대답을 얻었다. '공부를 다시 해야한다고 생각하는건 단지, 소위 좋다고 하는 대학 나왔기 때문이다,' '공부좀 하는 여자가 집에만 있으면, 나 우리엄마 아빠 가족들 좀 부끄럽기 때문이다,' 세련되게 말하면 '사회적 손실이 클 것이다,' --- 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곳에 생각이 미치고 나니 어딘가 철퍼덕 내려앉는 것이, 뭔가 결론이 난것 같아 깔끔하다는 느낌까지 들기 시작한다. 이노무 생선, 오늘은 비린내 나지 말아랏! 미림 뚜껑을 닫고 부엌을 나섰다.
왜 나는 해야 하는가. 우스웠다. 싸이의 노래를 개사하여 "나는 스마트한 엄마, 욕심많은 엄마~" 하는 노래라도 부를 수 있을것 같았다. 자기가 자신의 '자격'을 두고 운운하기 시작하여 '난 그럴 자격이 있다'는 믿음에 도달하면, 그건 자기애인가 자기비하인가? "엄마는 어떻게 화가가 된거야?" 라고 물으면 언제나 "그것밖에 할줄 아는게 없었으니까." 라고 하는 엄마의 자기비하적 멘트 뒤에는 "난 그것밖에 하고싶지 않아." 라는 자기애적 욕망이 숨어있는게 아닐까. 해질녘 일이 제일 잘되는데 그시간마다 집에 와서 밥을 차려야 하는게 너무 화 나, 엄마의 십팔번 멘트. 그러나 엄마는 동시에 자신을 무던히도 깎아내리고 있었다. 못하지 못해 하고, 죽지 못해 산다는 엄마에게 내가 하던 말: 엄마가 아빠랑 일찌감치 갈라서고 혼자서 나를 키워야 했다면, 그때 엄마의 일은 지금과 같았겠어? 내가 일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가릴것 없이, 삶은 그저 덤벼야 하는 것이 되었을 터이다.
자격은 언제 문제시될까. 선택지가 있을때 - 그러니까, "왜 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는 상황일때. 하거나 안 하거나 어쨌거나(!) 내 삶이 연명될 때. (그것이 정말 삶일지는 별개의 문제이고.) 그런데 선택지들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정도가 다를때. (정작 사회는 목청껏 '네 열정을 따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는 별도로.) 삶은 작은 것들로 드문드문 빛나는 밤하늘같다는걸 알면서도, 자기는 가로등이라도 되어야겠다고 객기가 불현듯 일때. 그렇게 해서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결국 헤칠때...
자기소개서를 마지막으로 다듬으며, 그 안에 써놓지 못한 나의 고백은 사실 하나 더 있다. "엄마 왜 대학 마치고 붓꺾었다더니 다시 그림 그렸어?" 하면 "네가 태어났으니까." 라고 말하던 엄마. 이제와 보건데 나 역시 공부를 다시 시작할, 아니 뭔가라도 할 유일한 순수의 동기는 은수 너에게서 온다. 네가 나의 미림이라는 거. 그러나 이 말은 철저히 내 안의 기도일뿐, 그들 앞에서 나는 조용히 가면을 써야 할 것이다. 내가 어느 대학을 졸업하였고 점수가 어디쯤 되며, 자기와 맞는 주제를 공부할 것인지에 관심있는 그들 앞에서 나는 '자격 있는 사람'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내몸 그 어디에도 없는, 자격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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