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일 화요일
그만 두는 밤.
이번 학기는 수업을 하나 듣는데, 하필이면 오후 다섯시부터 여덟시까지다. 제임스는 내가 이 수업을 들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때로 수업 시간을 정했다. 오후마다 제임스가 꼭 챙기는 낮잠시간이 끝나고 나서이고, 자기 말마따나 '끝나고 술한잔 하러 가기 좋은' 시간이기도 해서다. 사회성이 밝은 제임스가 수업 첫날 마치고 나서 내게 수업 시간이 괜찮으냐고 물었다. 내가 이시간이면 집에 가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이지만, 무어라 답하랴. 이럴때 정색을 하고 한 마디 칠 수 있는 위인이 나는 아니다. 괜찮다 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괜찮을 수 있는지 제임스는, 아니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들 모두는, 알지 못한다. 수업 마치고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형률에게서 와있는 문자를 확인한다. 집안 정리를 못하고 은수랑 잠든다며 미안하다는 문자다. 은수가 주말동안 감기를 앓았는데 그게 형률에게도 옮았는지 하루 종일 어지럽다 했었다. "어질거려도 화이팅!" 수업 시간 전 오후에 형률이가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였다. 퇴근 시간 러시아워를 막 지나간 지하철 안에는 사람은 적었지만 삼십여분쯤 전만 해도 북적였던 공기가 여전히 가라앉지 못한채 어딘가 휑하였다. 세시간을 머리에 박히지 않는 토론으로 헤매고, 어떻게 해도 내것이 되지 않는 타국의 언어로 어설프게 이해하려 애썼다. 언제나처럼 강하게 튕겨져 나온것 같은 패배감. 요즘은 타임스퀘어에서 환승을 하러 걸어갈 때 레코드샵 앞 화면에 늘 재생되어 나오는 "most famous knock-outs"라는, 권투 명장면만 모은 비디오의 짧은 클립들을 몇 초 정도는 서서 보고 간다. 누군가가 knock out될 때까지. 오늘은 어떤 선수가 한 대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가 금세 일어나더니 몽유병 환자처럼 링 위를 몇발자국 걷는 것을 본 뒤 업타운 일호선을 탔다. 차창 밖으로 급행 이호선이 앞서 달려가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내일 아침에는 오렌지를 챙겨줘야겠다. 은수와 형률은 침대에서 잠들어있고, 나는 현장을 검문하는 형사처럼 부엌에서 은수와 형률이가 보낸 지난 세시간의 흔적을 쓸어 담는다. 어제 해놓은 짜장 대신에 누룽지를 해먹은 것은 감기 때문에 따뜻한 것이 먹고싶어서였나보다.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한다. 앓고 있는 형률의 숨소리가 부엌까지 들려온다. 나는 이렇게 또 필드웍을 갈 수 있을까. 냉장고를 정리하고 보릿물을 끓인다. 둥글레 몇알이 낮은 소리로 함께 끓는다. 사랑하는 것들. 나를 유일하게 돌아오도록 하는 것들. 내가 들어맞는 것들. 이들만을 내게 남겨놓고, 이 모든 다른 것들은 그만 내려 놓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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