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9일 금요일

more than mother


옷장에서 재우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를 따로 재운다는 부모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영락없이 힘이 든다. 지금껏 은수 잠자리에는 내가 있어 왔고, 다른 사람이 대신하거나 혹은 은수 혼자 잠을 청한 적이 없었다. 삼년 사개월째, 매일 밤 8,9시 언저리 한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나는 오로지 아이가 잠들기만을 기다리며 보낸다.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없는 역할 - 의무이지만 특권이려니 생각하고 지내 왔다. 내가 누군가에게 절대적이라고 믿는 순간은 그러나 위태로웠다. 모성이 둘러싸고 있는 그 아우라가 실제의 살갗에 닿으며 이글거릴 때, 나는 차라리 생채기를 내면서라도 그 아우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엄마없으면 안 되는 나약한 자식새끼와 남편들을 만들어낸 건 결국, 어딜 가나 쫓아다니며 먹여주고 재워주곤 하는 엄마들이었다.

아이가 홀로 잠자리에서 잠 든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부비적거릴 대상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아이의 타고난 성격을 의미할 수 있고, 또 아이를 독립적인 존재로 키워야 한다는 부모의 신념을 의미할 수 있고, 이런 신념을 지지하는 부모의 타고난 성격 그리고 문화적 배경을 의미할 수 있다. 홀로 잠자는 것이 정말 독립성과 관련되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난 그저, 아이를 따로 재우는 몇몇 은수 친구 부모들이 아이를 어떻게 데리고 자? 정말 귀찮잖아(uncomfortable).” 라고 말하는 솔직함에 수긍한다. 아무리 해도 내가 입을 수 없는 저 쿨함.

내 몸이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으로 매어 있는 상황, 다른 사람의 심리적 안정/해소를 위해 내 몸을 내주어야 하는 상황. 손잡이마냥 내 젖꼭지를 잡고 늘어져 잠 들락말락 하는 순간이면 나는 이륙 직전의 비행기를 느낀다. 읽어보지도 않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천장에 띄운다

그리고 아이를 따로 재운다는 부모들이 나를 바라본 그 측은한 눈길에 사로잡혀 자기 연민에라도 빠지는 오늘 같은 밤이면, 마음이 왠지 바싹 마른다. 엄마라는 의무가 특권이기도 하잖니 따위의 윤활 어구가 먹히지 않아서. 그럼에도, 잠든 아이의 얼굴은 내게서 질퍽하고 찐득한 삶의 연료를 또 한번 뽑아 올리고, 그렇게 다시 한 번 나는 고갈의 순간을 향해 이륙한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