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 옆에서 세서미 스트리트를 보는데, 밀을 키워 빵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담긴 짧은 영상이 나온다. 씨를 심어 밀이 자라고 밀알을 거둬 껍질을 다 깐 다음 빻고 또 빻아서 고운 가루로 만든 뒤 재료를 섞어 반죽을 하고 모양을 만들어 불에 굽는다. 여러 계절과 여러 손을 거쳐 만들어지는 모두의 매일 양식이 오늘날에는 동전 몇 개면 어느 때고 사먹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런 시대는 오래 되지 않았을 테고, 하물며 100년 전만 해도, 그리고 지금도 많은 곳에서는 여전히 빵을 이렇게 해서 만들어 먹는다. 그런 삶을 상상해 본다. ‘먹고 살 걱정’이라는 말이 딱 맞다. 하루하루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찬 그런 삶.
빵 한 조각, 감자 몇 알, 죽 한 그릇, 아주 가끔 먹을 수 있었을 과일이나 고기 조금. 이 작은 것들로 하루는 꽉 찼을 것이다, 거창한 이상도 따라서 부질없는 푸념도 없이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은? 첫 두세 달 몸이 회복되기까지 조금 쉬는가 싶다가 여지 없이 일상의 노동으로 복귀했을 것이다. 먹거리를 마련하여 食口들과 나눠먹는 하루 일과는 쉼 없는 것이었을 터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자기 손으로 직접 그리고 매일 먹거리를 준비해야 하는 그런 삶의 고단함. 그러므로 빵 하나에도 감사해야 했던, 그래서 지금 우리보다 더 많은 것들에 감사할 줄 알았던 삶을 내가 ‘감히’ 좇을 수 있을까. 그 고단함이 거두어진 대신 오늘날에는 여자들이 무기력감에 시달린다. 저 빵 하나가 만들어지는 노동, 그 끝에 사랑하는 사람들 입 속으로 빵 조각이 하나하나가 들어가는 그 순간, 매일은 평범한 완성을 이룬다. 그 순간을 향하는 저 아낙들의 작고 오래된 의지가 지금도 여자들로 하여금 ‘일’을 갈구하도록 만드는 게 아닐까. 다만 이 시대의 일이라는 것이 더 이상 밀 파종에서 빵 굽기로 완결되는 온전한 경험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 매일 양식을 구하고 준비하던 과정 곁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일터가 아닌’ 곳에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 따라서 부모는 일의 부속이 되어가고 아이들은 부모의 부속이 되어간다는 점이, 지금 우리에게 ‘일’, 혹은 살아가는 의미를 자꾸만 잃어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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