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기르는것은 마담퀴리 위인전에서 보던 삽화같은 것일거라 생각했다. 잠든 아이가 누워있는 요람을 발로 살살 밀어가며, 나는 책상위를 누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책상 앞에서 잠시 멀어지더라도 전과 다른 영감이 샘솟을 터이니,이 시간을 다만 아이처럼 걱정없이 만끽하자고 되뇌었다. 그러다보면 어느순간 새처럼 부드럽게 나를 잡아올려주는 어떤 재생의 기회가 어깨위로 찾아올 거라고, 하늘을 올려다보듯 막연히 그렇게 바랐다. 아이를 낳고 2년이 지난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 생각은 증명되어야 하는 어떤 가설이며, 순진하게 받아들이거나 게으르게 지나치기에는 매순간 배반되기 일쑤인, 매우 취약한 생각임을 깨달았을 뿐이다. 허나 그 증명의 방식이 묘연한 지금이다. 양육의 경험을 통해 내가 어찌 내 삶속에서 날아 오를수 있을 것인가.
은수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길가의 키 크은 미류나무들 곁을 오늘 아침에도 지났다. 그 옆에서 여남은 마리의 까마귀들이 하얀 하늘을 날았다. 어린이집 가는 시간이 되면 말이 없어지는 아이 곁에서 나는 울적한 마음만큼 밝은 목소리로 'black bird'를 불러보았다. 이리 엉켰다 저리 엉켰다 새들이 서로를 비켜가며 빙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새들이 나를 집어올려주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머리 위로 내려오는 것만 같았을 때, 새들은 흩어져 날아가버렸다. 검은새야 날아라, 푹 꺼진 저 하늘 속으로. 출산과 육아를 앞두고 으레 이런 것이려니 생각하며 날아올린 기대들은 검은새가 되어, 은수와 내 머리위를 하염없이 날고 있었다. 날갯짓을 배우기보다는 그저 하릴없이 이리 솟구쳤다 저리 내리박았다를 하는 저 새들은, 나와 내 아이를 함께 들어올려 멀리 내다보내주기에는, 힘이 약하다. 나도 그만 울적해지려는 찰나, 유모차를 더 힘주어 밀며 다시 걷기 시작하며 외쳤다. 은수야 가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