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8일 목요일


네 일을 해라. 사람은 '자기 일'이 있어야 한다. 일을 해, 가정에 머물지 말고...
언제부턴가 '가정'과 관련된 일이 아닌 뭔가가 '일'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엄마는 집에 들어와 밥을 하고 청소를 하다보면 짜증이 난다. 화 난 얼굴로, 굳게 닫힌 입처럼 엄마 방 문을 닫고 들어가버린다. 그곳은 춥고 어둡지만, 그렇다 한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평온함이 찾아든다.

은수를 낳고 얼마 지나 교동집 현관옆에 내 책상이 다시 생겼을 때, 내 마음도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노트북을 열고 스탠드 불을 켰을 뿐인데,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게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다. ... 그리고 그날로부터 다시 나는 논문 투고의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감히' 아기를 낳아 길러보겠다는 마음이 굳어진것은 대학원 생활에 점점 지쳐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학문이 주는 맑은 집중감은 소중했지만, 아무리 해도 그 대상을 '느낄 수'가 없었다. 쉽게 메마르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았다. 흔히들 내 선택을 '일'에서 지친 이가 얻는 혜안으로 치받들거나 아니면 일종의 포기 혹은 휴식의 제스처로 읽는다. 이제 와서 보니 그건 오해이자 오독이다.

엄마는 내게 '네가 다시 공부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이를 갈겠다'고 한다. '결혼같은거 하지 말고 공부 하라'며 딸 등을 떠밀었다는 아무개 엄마 얘기도 한다. 딸이 가정에 '얽매이는' 모습이 안쓰럽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나는 할말이 없다. 아기는 수시로 울고, 경주라도 하듯이 엄마와 나는 먼저 달려가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쉴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애쓴다. 엄마는 '어서 가서 네 일 해라' 라고 말한다. 아기 보채는 소리를 들으며 책상 앞에 앉으면, 몸도 마음도 찰기 없이 부스러져내리기 일쑤다. 결국 아기 옆으로 달려가고 만다. 혹자가 보기에 나는 내 '일'을 '못한다,' '아기 때문에.'

얼마나 진부한가. 아, 왜이리 갑갑할까 ㅡ 통속적인 언어의 구조들 속에서 생각은 지체/정체 상태. 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모든 상념의 틀들이 투명하게 증발되어버린다. 이 거대한 우주가 덩어리가 되어 여기 이렇게 숨쉬고 있는데! 물속에 점점 가라앉을수록 고개는 더욱 필사적으로 위를 향해 쳐들게 되듯, 나의 생각들은 부단히도 헤엄쳐 오르려고 한다. '일'과 '일 아닌 것'을 가르는 것은 오직 그것을 행하는 의지 - 고개가 어디를 향하는가 -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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