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0일 월요일

반지의 제왕 3편을 오랜만에 다시 보니, 인물들이 자신의 신체를 대하는 법이 눈에 들어온다. 코 앞에서 적과 대면하고, 거의 확실한 죽음을 향해 돌진하며, 바닥 난 체력을 순수한 의지로 채운 뒤 홀연히 일어선다. 어디 영화 속 인물들만 그러랴. 삶의 길목마다 굶주림과 치명적인 상해, 질병 그리고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던 과거에는, 삶의 길목에 들어서는 행위들마다 신체에 대한 도전이 뒤따라야 했을 것이다.

신체의 고통에 대한 태도는 각자의 궁극적 과제를 직시하고 향하는 데 중대한 차이를 가져오는 듯하다. 신체의 고통이 어쩔 수 없는 것일수록 과제는 더욱 운명적인 것이 된다. 눈빛에서는 강한 두려움과 동시에 강한 의지가 함께 엮인, 한줄기의 집중감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예컨대 프로도의 눈빛).

반면 신체의 고통이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것일수록 과제는 더욱 선택적인 것이 되어서,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여러 갈래의 방법들을 누비느라 눈빛은 금세 분산되어 버린다. 예컨대 오늘날 출산은 예전만큼의 위험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대신, 특히 산모의 고통을 줄이고 때로는 몸매까지 지키는 방법들 사이를 오가느라 (여전히) 골치아픈 일로 남아 있다. 그러다 보면 이 과제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이 지닌 무게 그 자체를 온전히 떠안고 바라볼 여력이 없어지게 마련이다.

신체의 고통을 감소, 지연시키는 수많은 방법들이 개발되어 있는 요즘, 어떤 과제를 수행하는 데 신체적 고통은 반드시 수반될 필요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정확히는, 신체적 고통을 최소화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상식이다. 심지어 사형집행 방법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어떻게 고통 '없이' 죽게 할 것인지가 화두이다. 현대 의학은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해도) 줄여주는 데 '최선'을 다하는 오늘날 최고의 권위 영역이다 - 심지어 죽음까지 연장시켜 준다.

묘한 것은 이렇게 신체적 고통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 삶은 점점 탄력 잃은 고무줄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치명적인 고통만은 요리조리 피해가며 에두른 길을 가다보니,삶은 무료히 연장되어갈 뿐이다. 물론 고통을 최소화시키려는 노력은 -결국에는 죽음을 피하려는 노력은- 모든 생의 본능이니,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조금이라도 '덜 아픈' 게 미덕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다. 하지만 신체적 고통이 삶에 내재된, 심지어 고비마다 삶을 증명하는 표식과 같은 것이라면? 마라톤 경기에서 몇백미터마다 자리잡고 있어서 그곳을 지나야만 '몇백미터 지점 통과' 가 인정되는 포스트와 같은 것이라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괴로운 신체적 고통을 긍정하는 방법이 있을까?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옛날, 혹은 신화의 시대를 떠올려본다. 출산일이 되면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단 하나의 경로를 택해야만 했던 그때 - 산모와 아기 모두의 목숨을 걸고 출산에 임해야 했던 옛날의 치열함은 '감히' 다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과제에 수반되는 신체의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기를 '택한다는' 것이 이제 와서 가능할까? 이 질문은 아마도 나 스스로에게밖에 물을 수 없는 것으로서, 프로도 배긴스처럼 오로지 자기만이 성취할 수 있는 과제 속으로 사심없이 스스로를 던질 용기가 있는지를 자꾸만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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