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9일 토요일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요즘 라디오에서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의 엠마 커크비 버전이 자주 나온다. 내한공연이 벌써 끝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영향 때문인 것 같다 - 거의 일주일에 2번 정도씩은 나오는것 같으니. 유난히 자주 노래를 듣다 보니 제목을 곱씹게 된다. 특히 '참'의 뜻이 뭘까 궁금해진다. '참'이 '없어라'에 붙는 부사인 경우(1)와 '평화'에 붙는 형용사인 경우(2), 제목의 뉘앙스가 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1. 세상에 평화가 참으로 없구나!
  2. 세상에 참된 평화가 없구나!
라틴어 제목 Nulla in mundo pax sincera에서 '참'에 해당하는 sincera의 위치로 미루어보았을 때 (2)가 더 타당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만, 원문 제목을 모른다는 가정하에 부사/형용사가 쉬이 헷갈리는 우리말의 특징에만 입각해 굳이 사서 고민하는 이유는, 이 은총 가득한 슬픔의 노래를 좀더 잘 이해해보고 싶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노래 제목을 (1)로만 해석하고 있었는데 여러 모로 보나 (2)가 더 적절한 해석이겠다 싶다는 것이다.

어느것이든 참된 것은 드문 법이고, 그러다보니 우리는 참되어 보이는 것들에 짐짓 현혹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애초에 참된 것은 홀로 존재하지도, 영원히 존재하지도 않으니, 우리가 참된 것과 아닌 것을 가리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 (진짜같은 짝퉁을 넘어서 진짜보다 더 예쁜 짝퉁들이 넘치는 세상에, 그 상황에 '진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실한 몸짓은 어쩌면 단 하나, 속인의 몸으로는 도무지 잡을 수 없는 그 진정함을 향해 노래부르는 것 정도일까... 노래만이, 이분법으로 우리를 희롱하는 언어의 구조로부터 날아오를 수 있는 발판 구실을 해준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나누는 언어에서 둘 사이를 파고드는 시(詩)로, 거기서 다시 시를 읊조리는 음(音)으로 승화해가는 비밀의 계단이 노래 안에 있다.

비발디가 살았던 시대, 이태리에서는 당파 싸움이 쉼없이, 사람들을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나눠 넣기' 하고 있던 그 미친 시대를 가물가물 헤아려 본다. 나름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결국 그 누구도 서로에게는 정당하지 못했던 인간들 곁에서 비발디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평화', '사랑', '정의' 따위의 언어들로부터 발돋움해 그 어느것도 쉽게 분간되지 않는 슬픔을 노래하는 것, 그럼으로써 은총 어린 정화 의례에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었다. 과열된 말놀이에다 타는 듯한 영성을 붓고, 그 위에 신의 눈물이 흐르게 하니, 눈물로 맑게 씻긴 얼굴은 세상과 다시금 마주할 고요한 순간을 담는다. 물론 이 경험은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를 더 이상 '참된' 평화에 대한 억지 고집으로 오독하지 않을 때만 허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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